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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0일

거절이라는 이름의 자립

저마다 가슴 아픈 거절의 경험이 있다. 수업에서 한 분은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 아닌데…" 하면서 펑펑 울었다. 회사를 쉬기로 한 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부모님께 보냈더니, "네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으니 정신 붙들고 다녀라"는 카톡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는데 별일이 아니라고 했다니. 인지부조화네요."

자신에게 진실해지려는 시도를 환영받지 못한 채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건 참 고된 일이다.

내 주변에는 그 경로에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10년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자유로운 직업 탐색기를 보내며,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큰 용기를 내 작업실을 얻은 사람. 그는 좋아하던 가게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학교를 나와 자신만의 공간에서 새로운 주제로 교육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사람. 오랜 유학과 고연봉 전문직 생활 끝에 돌연 퇴사하고 치유자의 길을 걷는 사람. 반대로 치유자의 길을 걷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 저마다의 이유와 사정이 있다. 아직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가슴 깊이 품은 열망이 있다.

버티는 힘 기르기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야?"

가까운 이들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때로 참 따갑고 아프지만,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로 이해받을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시기를 빗겨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때 우리는 나를 의심하고 몇발 물러섰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나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천천히 무엇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버티며 내 눈앞의 비질을 한다.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라는 질문 세례를 받는 그 시기를 잘 건너가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나도 누구보다 잘 안다. 정말로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무엇을 느끼면서 무엇을 동기로 삼으며 살고 있는지를 잘 느끼고 이해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운동 말고는 체력을 기를 쉬운 방법은 없는 것처럼, 버틸 힘을 직접 기르는 수 밖에는.

"못 하겠어요." "그만 할래요." "계속 갈래요."

이런 거절을 자립의 시도라고 부르고 싶다. 이 말이 차마 입에서 안 떨어져서 아주 사소한 잔소리가 분노에 찬 대화로 치달을 때도 있다. 사실은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일, 이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은데 막상 현실에선 부모님과 필요하지도 않은 수박 한 통이나 세제 갖고 싸우는 일이 생기는 거다. 아주 사소해보이는 거절이라도, 나에게 진실한 삶을 살기를 택하기로 마음 먹는 청년들에게는 엄청난 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거절을 통해서 나를 지키고 버티는 힘을 기르는 건 누구나 성인이 되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 의례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근묵자흑이라는 표현은 어디에 속하는지, 누구 가까이에 가는지에 따라 쉽게 물든다는 뜻이다. 여왕벌, 숫벌, 일벌이 하나의 몸처럼 살아가듯 우리도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엉덩이 붙이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먹 가까이에선 당연히 검어진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나의 색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잘 감지되지 않는 내가 처한 환경, 집단의 영향을 분명히 인지한다.

2. 나를 듣는다. 내 느낌과 동기가 마음의 공간을 촘촘하게 채우고, 언제든 귀기울이기.

내가 어떤 영향 속에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함과 동시에,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귀기울인다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원래 색깔을 간직하기로, 때로는 적당히 희석된 색깔 안에서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로. 색깔을 바꾸고 싶다면 그 색깔이 될 수 있는 집단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 그건 서로의 영향을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원래 색깔을 간직하는 데도 기쁨이 있고, 새로운 색깔로 물드는 데에도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틈,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그 시간 동안 원래의 색을 유지하는 것도, 여러 색깔로 물드는 것도 나의 선택임을 받아들이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질 수 있다.

고립이 아니라 자립으로

요즘은 일자리 자체가 부족하거나 질이 나빠 어쩔 수 없이 구직을 멈추거나 쉬는 경우도 많지만, 기존 트랙이 자신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는 걸 감지하고 스스로 걸음을 멈춰 방향을 다시 찾는 경우도 많다. 그건 사회적 현상이다.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청년들이 방향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얘는 멀쩡히 앞으로 잘 가던 애가 왜 이제와서 뒤로 가는 거야?"

이런 주변 사람들의 압력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잘 소통하지 못하면 본능적으로 고립을 택하게 되기도 한다. (몇년 전 원주에 내려가서 전원주택을 짓고 살 계획까지도 있었다. 오, 신이시여.. 원주에 땅을 살 돈이 부족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기의 상황에 싸우거나 도망가는 것은 우리의 신경계에 새겨져 있어서 갈등이 어려우면 고립을 택하기 쉽다. 물론 한시적 고립에는 치유적 기능도 있다. 문제는 그것만이 유일한 거절의 방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이제 움직여볼 힘이 있는데도 그 상태를 고집할 때다. 무해한 안전지대를 가지려는 시도는 잠시 의미가 있었다는 이유로, 오래 시간이 지속되기 쉽다.

모든 일은 사람들 속에서 일어난다. 고립으로는 자신의 동기가 충족되는 방향으로 종국에는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에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더 나은 거절이 있을 수도 있다. 제 3의 방식이 있을 수도 있다.

30대에 접어들어서 탐색기를 거치며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 삶에 새로운 챌린지를 가져다 주는 모양이다. 우리는 기성세대도, 청년 세대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가 주는 압력에 따라 자신에게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선택을 내려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세대가 달라지고 있는 것도, 기성 세대가 이해하지 못해 마찰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사회적 맥락에서 보면 벌어질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서로의 삶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면 당신이 선 자리에서의 '뒤'가 그에게는 '앞'일 수 있다는 걸 존중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바로 서고 싶어

거절을 잘 하고 싶다는 건, 실은 스스로 바로 서고 싶다는 말이다.

"대체 뭘 하려고 하는거야?"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다. 그들과 나를 듣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때로는 당신이 맞을 때도 있다. 이 길이 더 좁은 길인 줄 알면서도 가는 게 틀림없이 맞을 때도 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가는 수밖에는 없다. 주변 사람들의 동의나 인정을 구하는데 지쳐 포기하고 싶어질 때, 그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곁에 둔 채 숨 쉬면서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로 꿋꿋이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며!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 오랫동안 품고 사는 가장 해로운 동기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입니다. 인정 받으려는 욕망이 너무 깊이 뿌리내리면 모든 자발성은 사라지고 내면의 눈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괴롭히며 벌을 줍니다. 

성인은 독립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관심, 인정, 애정, 비난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아기의 의존적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는 관계를 잘 맺는 법을 배워서가 아닙니다. 자기 입장을 제대로 내세우지 못해서 착하게 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무조건 착하게만 굴다보면 결국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요구까지 합니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야만 살아갈 자격을 얻는 사회구조는 창조적이고 진화하는 사회를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 모셰 펠든크라이스, <펠든크라이스의 ATM>

나를 듣기 · 길잡이 김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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