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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일

돌봄창작자들의 안전기지

영은이 이제까지 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일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모든 여정을 곁에서 지켜봐왔기에 영은이 자신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내린 결정을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더이상 이렇게 불안한 길을 걸을 수 없다는 영은의 고백에 흔들리는 마음이 앞섰다. 이제껏 해온 일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만큼 큰 일이긴 했나 보다. 함께 손 붙잡고 걸어온 동료가 다른 길을 택한다 하니 어쩐지 같이 걸어온 길이 빛이 바랜 것만 같았다. 혼란한 시간을 지나 내 눈앞에 비어 있는 새로운 종이 한 장이 눈에 보였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더 진솔해질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일찍이 센터에 출근해 책장을 비우고 쌓인 먼지를 털었다. 창고 구석에 쌓여 있던 책들을 풀어보니 작년 한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들고 간 <날마다 좋아지고 있습니다>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꼼지락PT로 만나게 된 필라테스 선생님께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한 권을 꺼내다 무심결에 첫장을 넘겨 봤다. 저자 소개 칸에 심리 분야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먼지 날리는 창고에 비스듬히 기대어 언제나 꿈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나를 동경어린 시선으로 돌아봤다. 언제, 어떤 방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하겠노라는 막연한 꿈이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라는 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울퉁불퉁한 길이 내게 남긴 것

10년 동안 겉으로 보기에 다양한 일을 했다. 처음에는 출근길 표정을 바꾸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고, 심리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을 그걸 필요로 하는 직장인들과 연결해주는 일을 하다, 나중에는 온/오프라인, 녹화 영상, 라이브, 리트릿 등 다양한 형태로 명상 교육 사업을 했다. 지난 1년 동안은 요가원 겸 명상 센터를 운영하면서 1:1 움직임 개인 레슨을 했다. 사업의 형태도 다양했지만, 도구도 다양했다. 다 다른 일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에겐 모두 같은 일이었다. 도구는 다르지만 목적은 자기돌봄, 자기이해를 통한 인간 존엄의 회복이었다.

바쁜 나에게 주는 잠깐의 보상이나 자랑할 수 있는 고상한 취미, 더 잘 일할 수 있도록 돕는 효과적 휴식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게 내가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 나은 곳으로 가서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고, 사회적 조건을 내려놓은 상태에서도 존재 자체로 온전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명상을 통해서 존재의 귀함을 느끼도록 돕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어떤 벽에 부딪힌 듯 했다.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자 신체 감각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새로운 배움을 만났다. 명상으로는 풀기 어려웠던 주의력과 이완, 재트라우마 등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던 중이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소마틱스의 경험이 이제까지 찾던 보물처럼 느껴졌다. 더 나은 방식을 찾겠다며 집요하게 매달리는 바람에 대중의 시선에서 따라가기가 점점 어렵게 느껴졌겠지만, 우리 마음 속 두려움과 강박,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한 나은 방향을 찾으려 한 것만은 진심이었다.

놀랍게도 그런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온 탓에 내게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재료들이 꽤나 준비되어 있었다. 포지셔닝 및 핵심 가치 정리, 프로그램 기획, 마케팅, 공동체 운영 등 비록 완벽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한 명의 팀원처럼 곁에 붙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은 되어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또 무언가를 시도해볼 ‘눈풀꽃’이라는 공간과 작업물을 소개할 수 있는 ‘왈이네’라는 채널이 내게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의 경험이 의미있게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소통

제일 어려웠던 걸 꼽는다면 소통이었다. 그동안 마음챙김이라는 어려운 기술을 쉽게 전하는 데 우리만큼 잘해온 팀은 없다는 자부심은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가장 소통이 쉽고 자연스러웠다. 잘 모르니까 더 용감했고, 내가 바로 그 대중이기 때문에 어떤 지점이 목마른지 어렵지 않게 보였다. 하지만 진실은 복잡해서 더 깊이 알아갈수록 쉽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돕고자 공부하고 수련하는 것인데도, 막상 우리가 제안하는 방식이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구체화하는 일에는 게을러진 때도 있었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 용어 뒤로 숨어버리거나, 내가 믿는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탓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각기 달라 보이는 몸, 마음의 도구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소통하는 일은 버거웠다.

소통이야말로 앞으로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더 잘해보고 싶은 일이 됐다. 대중과의 간극이 너무 큰 것은, 이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화두니까. 여전히 마음 건강, 몸 건강에 대해 양질의 정보가 충분히 보급되고 있지 않은데다, 특히 심리 중심의 웰니스 분야는 이제 겨우 극초기 시장을 벗어난 정도다. 시장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심리학계는 여전히 그 안에서 이해다툼을 벌이느라 막상 대중에게 마음 건강에 대한 정보를 친절하게 소통하는 일에는 큰 에너지를 쏟고 있지 못하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10년 전보다 마음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것, 단순히 성장만이 아니라 행복을 포괄하는 성장으로 점차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경험에 있어서는 심리검사, 명상 앱이나 감정을 쓰는 다이어리 서비스, 숙박형 리트릿 정도에 머문다.

진심으로 사람들의 변화를 관찰하며 교육하는 분들이 사업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우리만의 어법에 갇혀 대중의 이해 밖으로 벗어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비즈니스 언어로 바꾸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서다. 자본주의, 성장제일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와 싸우거나 회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치를 수치화하는 것이 어려운 돌봄 분야에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변화를 보이게 하는 일도 앞으로 계속 매달려야 하는 일 중 하나다.

본질을 추구하다 보니 기존 문법에서 이탈했고, 그 결과 사업이 영위하기 어려워지거나, 설명이 안 되어 고립되는 창작자들과 자신을 소개할 언어를 함께 찾고, 그들의 창작에 함께 머리를 맞대는 동료가 되어주고 싶다. 나에게도 그런 동료가 필요하니까. 나에게 정답은 없지만,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이 일을 이제껏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모로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복잡한 조립 가구처럼 정교한 조각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필요했다. 충분히 훈련하는 배움의 시간이 필요했고, 좋은 교육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배들이 필요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자원, 도움이 필요했다. 그 배움에 계속 불을 지피는 멤버들이 필요했고, 어렵게 익힌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일, 내가 담으려고 하는 가치를 소개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야 했다. 사람들에게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기 위한 환경을 구축하는 일도 필요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소통을 위한 노력, 좋은 교육, 가치를 나눌 사람들, 경험이 많은 선배들, 그것을 펼칠 장소 등 수많은 작은 조각들이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건 돌봄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본다. 이 모든 일을 하는 건 결국 사람인지라 우리 자신의 돌봄 없이는 이어갈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돌봄의 가치이고 인간 존엄의 회복이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우리를 돌보기 위해 애썼다. 사랑과 애정으로 나를 지탱해주는 사람들의 촘촘한 도움이 없었다면 위의 모든 게 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타인을 돌보는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 위태로운 순간에 돌아가서 숨을 고르고 다시 용기를 내도록 돕는 안전기지가 필요하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의 첫번째 유저이자 팬이 되어주는, 단단한 유대가 아닐까. 함께 재밌는 시도를 해보면 좋겠다. 마르쉐에 지역 농부들이 모이듯 함께 모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가치를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행사를 함께 꾸려볼 수도 있겠고, 서로에게서 배우는 품앗이 수업을 열거나 여러 명이 모여 새로운 경험을 창작해볼 수도 있겠다. 안전기지가 단단해진다면 조립 가구의 나사가 하나 빠지더라도 옆에서 빌려주고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돌봄창작자들과 만나고 싶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을 돌봄창작자라고 이름 붙이고, 이렇게 정의해봤다. 

[몸, 마음의 돌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창작하고 있는/창작하고자 하는 사람들]

  • 강사가 아닌 창작자: 나의 경험과 지식을 엮어 새로운 콘텐츠와 경험을 만드시는 분

  • 방법보다 본질 : 상담, 쓰기, 움직임, 건강식 등 방법론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를 돌보는 힘을 기르고 서로 돌보는 문화를 만드는 일에 진심인 분

  • 확장된 연결: 개인의 변화가 다정한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라 믿으며, 돌봄의 사회적 가치를 고민하시는 분

  • 경험이라는 이름의 실력: 직접 통과해온 자기만의 임상과 데이터를 가지고 계신 분

돌봄 창작자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쓰기, 움직임, 상담, 요가 등 도구는 각자 다르지만 돌봄과 인간 존엄의 회복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한다면 우린 틀림없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창작자들이 생존을 위해 창작을 포기하지 않도록, 그들의 철학이 지속 가능한 일이 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다.

왈이네를 하면서 확실하게 배운 게 하나 있다면 ‘혼자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함께, 언제나 함께’라는 거다. 혼자서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돌봄창작자들이 모일 수 있다면 좋겠다. 몸과 마음 다루는 도구를 재료 삼아 우리 사회의 깨진 리듬을 다시 맞추는 돌봄창작자들과 서로 돕는 안전기지를 만들면 좋겠다. 눈풀꽃에 따뜻한 차를 끓여두고 기다려야겠다. 함께 이 기지를 만들어갈 돌봄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함께 하고 싶은 것들 메모.

  • 레퍼런스 데이: 각자 영감을 받은 책, 음악, 도구를 가져와서 소개하는 날. "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요가 시퀀스를 짜요"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다정한 공유회.

  • 실패 공유회: "이렇게 기획했다가 한 명도 안 왔어요", "수업하다가 이런 실수를 했어요" 같은 아픈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다독이는 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함께 웃는 시간.

  • 우리끼리 리트릿: 도시를 벗어나 1박 2일간 서로에게 '휴식'을 선물하는 시간. 한 명은 명상을 가이드하고, 한 명은 건강한 밥상을 차리는 식으로 각자의 창작 도구로 서로를 돌보는 여행을 떠나기.

나를 듣기 · 길잡이 김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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