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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일

방탄 안전망

“지언아. 너 오늘 좀 힘들었지?”
어느 날 영은 언니가 내게 물었다.
“왜?”
“음..계속 돈 이야기가 나와서.”

우리 가족이 만나면 언제나 돈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별다른 경각심이 없었다. ‘돈 이야기를 한다’는 그 7글자의 말이 어쩐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번 달은 몇 명이나 들어왔어? 이번 달은 수입이 어떻게 돼?’ 그런 질문을 듣다 짜증낸 적은 있어도, 엄마는 왜 늘 돈 이야기를 할까, 건조하게 궁금해 한 건 처음이었다.

엄마는 특히 내가 집도, 차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늘 불안해했다. 집이 하나 있으면 참 좋을텐데. 차가 있으면 좋을텐데. 이번 달에 책이 나오고 돈이 들어올 일이 생겨도 엄마는 또 불안해했다. 다음 날은 어떠니, 하고 물어보는 엄마 앞에서는 어딘가 잘못 살고 있는 것만 같아 주눅이 들었다.

재작년쯤 몰던 차가 너무 오래되어 중요한 벨트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카센터에 다녀오면서 이제 폐차하거나 아니면 몇백만원 들여서 벨트를 교체하고 3,4년 정도 더 타는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전엔 차 에어컨이 고장나서 혹독한 무더위에 시달리다 결국 돈을 들여 고친 참이었다. 더 돈을 들여야 하나 고민하며 부모님께 자문을 구했더니, 그 이후로 엄마는 시름시름 앓다시피 했다.

머지 않아 전화가 왔다.

“아니, 보니까 캐스퍼를 12월 중에 사면 할인을 해준다는데, 캐스퍼를 살래? 내가 캐스퍼 하나 사줄 돈이 되는데.”

엄마는 자꾸 ‘지금 당장’ 캐스퍼를 사라고 했다. 그날이 12월 29일쯤이었으니 이틀이 남아 있었고, 결국 현대차에 가서 캐스퍼를 직접 타봤다. 나는 이 모든 결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싫었다. 지금은 차도 원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캐스퍼도 원하지 않았다. 차를 사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래라.”

엄마는 자기가 사준다는데도 마다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어떤 선물은 선물이 아닌 법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침대 맡에 앉아 엄마의 유년시절을 돌아봤다. 난 엄마, 아빠 중에서는 차라리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편이 더 속이 편했다. 우유 한 번 먹어보고 싶다 말했다 혼나는 참 배고픈 유년이었지만, 아빠의 이야기에 가슴이 저며오는 모멸감은 없었다. 워낙 가난한 시골이라 주변 사정도 다 고만고만했다.

엄마의 세상은 조금 달랐다. 아빠와는 다르게 뼛속까지 서울 사람으로, 아빠와 비슷한 시대에 좀더 미래를 산 것만 같았다. 엄마는 학구열 높은 할아버지 밑에서 예쁨을 받으며 컸다. 할아버지는 엄마 손을 붙들고 가 비싼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엄마가 우리에게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말할 때면, 아빠는 언제나 그 대목에서 ‘어떻게 그 시대에 바이올린을 배웠냐’며 부러워 했다. 난 엄마가 자신이 운동 빼고는 정말 다 잘했다는 말을 할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깍쟁이 소녀의 서울 말씨를 좋아했다.

엄마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다. 당시의 일반적인 집안에서라면 할아버지 뻘이었다.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부잣집에, 꽤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 서울로 피난 오면서 첫째 아들을 제외한 원가족들과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외할머니와의 재혼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했다.

그렇게 순풍이 불던 어느 날 고기를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엄마가 사춘기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당장 먹고 살 돈이 없어지자 동네서 알아주는 똑순이였던 엄마는 부잣집 아이들 과외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엄마는 그렇게 일을 구한 것이 ‘운이 좋았다’는 표현을 썼다. 그 시기는 엄마의 수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지만 과외로 버는 돈이 꼭 필요해 그만둘 수 없었다. 엄마는 학교에서는 공부하고 마치고는 과외를 하면서 틈틈이 학교 신문사에서 기자로도 일했다. 요즘 말로 ‘갓생’ 사는 당찬 소녀였다.

아버지뻘 되는 배다른 오빠는 당시 서울대 교수로 인텔리였다. 그는 어머니라 부르기엔 너무 젊은 새 어머니인 외할머니와 너무 어린 동생의 존재를 수치스러워 했다. 엄마는 종종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 오빠 집에 갔다. 오빠의 자식들은 엄마 자신과 나이가 비슷했다. 또래 부잣집 아이들을 과외하러 다니는 마당에, 단박에 비교가 되는 형제 뻘의 아이들과 저녁 밥을 같이 먹으며 무슨 마음이었을까. 폭풍우가 쏟아지는 날씨에 무참하게 헐벗은 기분이었을까.

엄마는 가끔 그 집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다 무릎이 까진 날에 대해 말했다. 오빠의 처가 이렇게 말했다며 흉내를 냈다.

“어머, 어떡하니. 니네 엄마 속상하겠다.”

엄마는 아직도 그 여자가 한 말을 잊을 수 없는지 부르르 떨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근데 왜 할머니가 일을 안 하고 아직 어린 엄마가 일을 다녔어?”

“할머니는 할아버지 병간호 하느라 바쁘고. 그리고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니.”

엄마는 밉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한 투로 말했는데 내가 미운 건지 할머니가 미운 건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헌신적이며 측은지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엄마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엄마의 엄마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말년에 귀가 어두웠던 할머니는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때가 많았는데, 엄마가 돈을 타러 오빠라는 사람에게 가던 날들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가 살던 집 문서를 그 가족이 빼돌린 것을 알게 되고 거리에 나앉게 된 이야기였다. 할머니 입에서는 달면서도 쓴 팜피린 냄새가 났다.

고등학생이 과외를 하면서 자신의 성적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엄마는 글을 쓰거나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여건상 안정적인 진로와 장학금이 모두 필요했고, 성적은 엄마가 원하는 학과에 갈만큼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원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간호대라는 선택지가 남았고, 아마도 주변의 도움으로 입학금을 내고 대학에 간 것으로 안다. 

가까운 어른들은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하라며 엄마의 대학 진학을 막으려 했다지만, 엄마는 공부를 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미 엄마는 똑똑함을 무기로 집안을 부양하는 가장이었다. 학교는 더 위로 올라가도록 길을 열어줄 유일한 사다리였다. 매일 한 걸음씩 성실히 올라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나는 자라면서 엄마가 붙든 사다리를 똑똑히 봤다. 오빠와 나를 데리고 시골에서 서울 8학군으로 이사 왔을 때, 유명 영어학원을 들어가기 위한 입학용 영어학원을 다닐 때, 너는 공부하라며 책상 위에 예쁘게 깎은 감과 사과를 넣어주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갈 때,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끌고 가 학교에 통학을 시킬 때 다시 한번 힘을 짜내 사다리를 올랐다. 그때만 하더라도 엄마가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다. 내가 트로피 딸로서 더 높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만을 바라는 줄 알았다.

엄마를 들으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고 나서야 그 집요한 돈 이야기 속에 어떤 ‘안전망’에 대한 갈망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엄마 안의 두려움을 의미했고, 엄마가 자식에게 절대 주고 싶지 않은 어떤 경험을 뜻했다. 엄마는 자식이 대단한 삶을 살기 보다, 너무 힘든 삶을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돈이 삶을 휘두르는 것을 무서워 하고 있었고, 무서워하면 무서워할수록 돈은 엄마 삶을 자꾸 흔들었다. 처음부터 엄마는 나였고, 나는 엄마였다.

‘갑자기 세상에 큰 일이 생겨도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방탄 안전망을 만들자.’
엄마의 두려움은 안전망을 더 안전하고 튼튼하게 만드는데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쓰게 했다. 방탄 안전망이란 판타지는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안전망에 대한 집착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엄마의 기대가 너무 버거워.”
불안과 두려움이 내 몫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에서야 그렇게 입밖으로 말할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분명히 보였다. 엄마의 불안에서 툭 튀어나오는 ‘돈 이야기’는 실은 당찬 소녀의 포부, 강력한 열망, 가정을 보호하고 지키는 마음, 책임감, 그 모든 것이기도 했다. 내가 미워했던 엄마의 무거움, 자신이 옳다는 데에서 오는 고집스러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하는 강렬한 불안이 모두 엄마라는 것이 믿어졌다. 경직성과 고집스러움의 다른 말은 빛나는 충직함과 성실함이었다.

최고가 되라는 말. 더 높이 올라가라는 말. 언제나 지금 이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도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엄마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만큼의 안전망이 없었다. 정말로 최고가 되고 싶었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었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던 건 엄마 자신이었다. 충분히 꿈꿀 수 있는 환경이 엄마에게 없었다는 사실이, 어떤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으로서 내게 흘러들어 왔다. 엄마의 안전망은 엄마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이었구나.

엄마, 엄마는 인생을 바쳐 튼튼한 보호막을 만들어 왔네.

엄마 덕분에 배 곯지 않고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엄마의 불안은 처음부터 내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칠 필요조차 없을지 몰랐다. 지금도 숨쉬듯이 안전모를 쓰고 보호막을 꼼꼼하게 정비하고 있는 엄마는 알까? 오래도록 꿈꾸던 안전망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그 안전망이 이렇게나 튼튼하고 온전해서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를 듣기 · 길잡이 김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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