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일
“나는 뉴저지 출신 유대인 여성이다. 내가 다른 곳 출신이길 바란 적이 있을까? (..) 유년시절도 그렇다. 내가 어려서 호흡한 분위기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이는 내 재료의 근간이다.
외동아이, 나이 지긋한 부모, 말다툼이 많은 결혼생활, 정통 유대교, 종교적 갈등, 교외의 양육, 아동 모델,반항적인 10대, 비극적인 사고는 그저 나열된 목록에 불과하지만, 함께 엮이면 마디와 매듭을, 직물의 질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직물이 있다. 우리 삶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들이 예리해지고 마치 점자처럼 솟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의 주제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우린 이런 직물을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둘러볼 때처럼 고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안녕하세요, 저 작가의 인생 환경이 정말로 마음에 드네요. 저기 남부 고딕 어린 시절로 해야할 것 같아요.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에 미쳤고, 헛간에서 총기사고가 일어나고요. 그런 식으로는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할당된 우주의 조그만 구석이 마음에 들건 말건, 우리가 가진 건 이게 전부다. (..) 내가 글쓰기와 인생에 대해 알고 있는 진정한 교훈은 우리는 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소명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조용히 작업할 때, 커다랗고 늘어진 모자를 쓰고 정원용 장갑을 끼고 목 뒷덜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팔에 주근깨가 난 어머니가 보이는 것 같다. (..)
말해지지 않은 것들. 나는 그걸 말하려고 인생을 바치고 있다. 그것은 내 것이다.”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성묘를 하러 갑산에 다녀왔다. 꽤 오랜만이었다.
오빠가 BMW를 운전했다. 우리는 각자의 고정석에 앉았다. 아빠는 보조석에, 엄마는 조수석 뒤에, 난 언제나 그랬듯 운전석 뒷자리에 탔다. 차에서는 오빠가 졸업할 때즈음인 2010년대 힙합이 흘러나왔다. ‘혼자 운전’이라는 플레이리스트였다. 오빠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음질이 유난히 좋았고, 엄마는 시끄러워 했다.
우리는 가는 길에 언제나 그랬듯 시답지 않은 온세상 불만을 늘어놨다. 나도 한몫 거들고자, 엄마, 아빠와 지난 번에 같이 다녀온 안동국시집을 친구들과 다녀왔는데 역대급 푸대접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일에 대한 이야기에 시큰둥한 반응이던 아빠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이렇게 네 가족이 모두 모이면 뭐라도 투정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우리 가족 내에서는 이 주제가 가장 소구력이 높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떻게 했는데?” “밥을 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나가달라고 하는거야. 지난 번에는 국수도 나눠주셨는데, 나눠주지도 않고. 후식도 음식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주시더라고. 친구들이지만 나름 손님 대접하러 간 건데, 민망했어.” “밥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나가라고 했다고?” “진짜 그랬다니까.” “다음에 가서 따져야겠네.” “아이, 됐어.”
거의 공원에 다 도착했을 때(주차장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아빠는 갑자기 내가 한달에 얼마를 버냐고 물어봤다.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건 있니?” “있지.” “200은 되니?” 엄마도 내심 궁금했는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지난달, 지지난달에는 그랬으므로, 일단 그렇다고 말했다. ‘노코멘트’라는 옵션도 있다는 것이 나중에서야 떠올랐다. 나는 아빠가 뭘 물어보면 1초만에 답을 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그건 아빠가 워낙 성질이 급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안심시켜주고 싶은 마음의 발동이었다.
오빠는 내가 걱정스러워졌는지 ‘너의 상황상 지금 마케팅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때쯤에는 이미 주차장을 돌고 있었다.) “너가 콘텐츠를 만들고 그럴 정신이 없으면은, 방송 콘텐츠 그런 거 릴스로 따와가지고 올려서 사람들을 끌어모은 다음에 천천히 서비스에 대한 콘텐츠를 올리면서(..) 사람들이 그런 걸 좋아해(..) 식으로 하는 경우도 많던데, 너도 그런 게 필요한 거 아닐까.” 사업을 준비 중인 오빠로서는 최선의 방책을 공유한 것임을 알았다.
가족들의 걱정으로 차 안의 공기가 가득찼다. 나의 오랜 습관이 찾아온 것을 느꼈다. 가족들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이 기분. 몸에서는 앞 가슴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느껴졌다. 발가벗겨진 아이가 된 것 같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이었다. 그때 마침 차에서 내려 혼자 손에 든 쓰레기를 버리러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한걸음 걸으며 들이마시고, 두 걸음 걸으며 내쉬었다.
부끄러움을 느낄만한 상황인가? 지금 나의 수입은 비정기적이지만, 수입만으로 나의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그것을 기준에 두고 생각한다면, 지금 내가 인스타그램에 방송용 콘텐츠를 따다 마케팅에 전념하는 것은 비합리적 선택이었다. 점점 호흡이 고르게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넓어졌다. 공원은 아름다웠다. 사방이 온전히 뚫려 있었고, 적당한 볕이 모두를 환영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의 모든 진실이 전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에게 말해주는 듯했다.
지금 나에게 좋은 일들이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하나는 수년간 이어오던 많은 고민들이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방향이 정해져서 이제는 실행만 하면 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도자 과정은 성공적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가족과도 나누고 싶었지만, 어떻게 물어보냐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아빠는 아빠가 듣고 싶은 답—잘 벌어먹고 살고 있어요—을 찾을 것이었다. 그게 엄마, 아빠가 눈을 감는 그날까지 나에게 물을 유일한 주제일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질문도, 그 마음도 그의 몫이었다.
외할머니의 묘와 친할머니, 할아버지의 묘는 같은 공원의 끝과 끝에 있었다. 먼저 외할머니의 묘에 소주를 따르고 정성스럽게 절을 올렸다. 우리는 각자 꽃, 소주, 과일, 돗자리를 나누어 들고 아주 촘촘한 계단을 끝까지 걸어 올라갔다. 헉- 헉- 아빠만 유일하게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았다. 계단을 총총 걸어올라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묘를, 그 묘 앞을 화려하게 채우고 있는 알록달록 조화꽃을 봤다. 한 달만 흘러도 색이 바래는 조화가 대부분 원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부지런한 발자취가 느껴졌다. 어느새 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나왔다.
“이 집은 기독교. 저집은 불교. 저긴 가톨릭이네.”
가장 꼭대기 층 바로 아래에 위치한 할머니, 할아버지 묘는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더 선명해지는 곳이었다. 멀리서 나의 우주였던 우리 가족을 봤다.
가끔 절에 가지만, 신을 믿지 않는 우리 엄마, 아빠. 엄마의 늙은 아버지와 유순한 엄마. 아빠의 아주 어린 어머니와 바람둥이 아버지. 십대에 이미 엄마의 엄마가 되어야 했던 딸인 엄마. 아직도 엄마를 조금도 미워할 줄 모르는 엄마. 모든 기대와 특권, 책임을 짊어진 첫째 아들이었던 아빠. 그림이 좋았지만 돈 못 버는 화가가 되지 못했던 아빠와 글 쓰며 살고 싶었지만 장학금을 받아야 해서 생뚱맞은 전공을 택한 엄마. 두 사람의 그늘. 갑자기 돌아가신 아빠의 엄마와 엄마의 아빠. 어린나이에 양집안의 대들보가 된 나의 부모. 무거운 책임감. 돈이 삶을 선택한 순간들. 여기에서 내 삶의 주제들이 나타났다. 좋든 싫든 여기가 나의 근간이었다.
“쓰는 사람?” 성묘를 마치고, 오빠가 나를 보고 툭 던졌다. “뭐라고?” 알고 보니 핸드폰 뒤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던진 말이었다. “나 쓰는 사람으로 살려고.” 투박한 진심이었다. 엄마가 다시 한번 나를 빤히 봤다.
성묘를 마치고 엄마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나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던 피자집에 기어코 나를 데려갔다. 엄마는 어디 괜찮은 곳을 찾으면 틈날 때 나를 데리고 가보려고 성화다.
“이 맞은 편에 왈츠와닥터만 있잖아. 거기는 참 열기 직전부터 어떻게 알게 돼서 일년에 한 번은 갔을 거야. 그 시골에 살면서도 참 많이도 돌아 다녔지.” “어떻게 거길 알게 된거야?” “이름에 닥터가 들어가잖아.” “아, 뭐야. 그것 때문에 가게 된 거야? 하하.” “그때는 거기 스테이크가 참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어딜 가도 비싸니까 비싼 줄도 모르겠어. 하하.”
나를 듣기 · 길잡이 김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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